학위 막바지에 체력은 바닥을 찍고 있었습니다. 실험실 계단 네 층을 오르고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걸 느끼며, “운동을 시작해야겠다”는 다짐을 하루에도 스무 번씩 되뇌었죠. 그러던 어느 금요일, 학교 앞 버스정류장 전광판에 낯선 광고가 번쩍였습니다.
“프리미엄 피트니스 평생회원권 대학원생 한정 72% 할인!”
‘평생’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습니다. 5년치를 선납하면 사실상 반값이라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았습니다. 운동복까지 무료로 준다는 문구에 혹해 QR코드를 찍었더니 카카오톡 상담창으로 연결되더군요.
첫 만남, 지나친 반가움
채팅창 프로필 사진엔 근육질 트레이너가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. 상담사는 열 줄을 채우기도 전에 제 이름을 부르며 “선착순이라 서두르셔야 해요!”라고 했습니다. 스튜디오 이름은 ‘루미너스 휘트니스’. 내부 사진이라며 보내 온 이미지는 조명이 번쩍이는 럭셔리 헬스클럽이었지만, 어째 배경에 보이는 기구 배열이 모든 사진에서 똑같았습니다.
계약 조건, 달콤한 압박
상담사는 “오늘 밤 11시 전에 계약하면 개인 PT 20회가 무료”라며 360만 원짜리 평생권을 99만 원까지 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. 제 주머니 사정을 알 리 없는 사람이 가격부터 한없이 깎아 주니 오히려 이상했습니다. 그때부터 머릿속에 ‘좋은 기회’와 ‘이상하다’가 씨름을 시작했습니다.
둘러본 헬스장, 존재하지 않는 주소
“내일 근처라 직접 가 보고 계약하고 싶다”고 했더니 상담사는 “공사 마감 중이라 견학이 어렵다”고 답했습니다. 대신 지도 링크를 보내 주었는데, 눌러 보면 커다란 공원 한복판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. “지번이 새로 생겨 지도 업데이트가 덜 됐다”는 설명이 뒤따랐지만, 공원 안 헬스장은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.
불쑥 튀어나온 추가 할인
제가 망설이자 상담사는 마지막 카드라며 “등록금 영수증 사진 주시면 추가 5% 더!”라 제안했습니다. 순간 불편함이 스쳤습니다. 다른 판매자가 내 개인 정보를 왜 모으지? 금액 따위는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.
결정타가 된 검색창 한 줄
마지막 확인이라는 생각으로 ‘루미너스 휘트니스 평생권’을 검색했습니다. 포털엔 공식 웹사이트도, 블로그 후기도 전혀 없었죠. 대신 먹튀위크 게시판에 “선입금 사기 주의”라는 게시물이 눈에 박혔습니다. 피해 사례 속 상담 번호와 제게 온 번호가 동일했습니다. 계약금만 받고 폐업신고도 없이 사라졌다는 글을 읽는 순간, 제 머릿속 씨름은 싱겁게 끝났습니다.
뒤돌아보며 얻은 숨 고르기
채팅방을 나가면서도 허탈감보다는 안도감이 컸습니다. 그 길로 집 근처 공공체육센터를 알아봤고, 월 3만 원짜리 자유 이용권을 끊었습니다. 트레이너가 붙지는 않지만 언제든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.
지금도 버스정류장을 지날 때마다 화려한 광고가 눈길을 끕니다. 하지만 그 아래에 깔려 있을지도 모를 공백도 함께 상상하게 되더군요. 결국 운동이든 연구든, 가장 값진 건 한 번 더 호흡을 고르고 확인할 시간이라는 걸 깨달은 사건이었습니다.